천륜마저 저버린 참상 [국정일보 문이주 기자]

문이주 기자

작성 2020.08.27 12:58 수정 2020.08.27 13:22

문이주 기자 = 인조는 재위 27(1649) 5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바꾸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들을 죽인 인물에게 어질 인()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모든 역사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샬을 만나 성리학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세자와 세자빈 강빈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1636, 병자년) 3월에 원손을 낳았고, 그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후금과 조선은 형제지국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해마다 음력 시월에 중국에 가는 사신이 가지고 가던 공물)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청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 1천 냥, 각종 직물 12천필, 3천 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 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마부대 등이 인조비 한씨의 조문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결국 병자호란이 발생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16371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은 끝났다.

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인질로 요구하므로 협상의 큰 걸림돌이었으나 세자 자신이 인조 15122일이 너무 급박해졌다. 나에게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며 인질을 자청했다.

인조 15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간 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인조 23(1645) 2월 소현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한 해 전인 인조 22년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아버지인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왕곡(往哭)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있다가 사흘만에 급서했다. 서른네 살의 건장한 세자의 급서는 독살설을 낳았다.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 이형익을 비호했고, 세자의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宗法)에 따른 원손마저 폐위하고 봉림대군(훗날 효종)으로 결정했다.

인조는 강빈에게 누명을 씌우고, 강빈과 어머니와 두 오빠를 제거 했다. 그리고 인조의 손자 세 명도 귀향지인 제주도에서 결국 죽고 말았으니 어찌 천인공노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시대적 착오가 쿠데타가 가족참살로 이어져 조선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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