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남긴 발자국 [경찰일보 문이주 기자]

문이주 기자

작성 2020.07.13 10:04 수정 2020.07.13 10:04


문이주 기자 =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는 순간부터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지금 역사를 쓰는 사람들도 열심히 집권자들의 치부를 감추고 있고 역사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그 치부를 보는 것을 원치 않으니, 둘 다 역사 왜곡의 공범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록은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 모두의 가치관을 왜곡시킨다.


조선보다 몇 십 년 앞서 개국한 명나라는 조선인의 조상보다 더 우대 받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은 전 분야에 걸쳐 명나라를 그대로 모방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정통성의 필요성 때문에 명을 상국으로 모시기로 스스로 맹세한 나라였다. 그래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바치고 평화를 살 수 있었으니 이후 명의 무수한 횡포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는 조선이 안일과 나태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명의요구에 따라 생산되는 말()을 전부 바쳐야 했고, 모든 제도를 명의 방식대로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개국 이래 처음으로 나라 이름까지 명에게 물어서 결정했다. 명은 조선에 금, , , 처녀를 조공으로 요구했으며 조선은 이를 조달하기 위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종 때에 이르러 조선에 금과 은의 생산량이 보잘것없다는 점과, 인륜상 차마 할 수 없는 처녀 조공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물목을 인삼으로 바꾸어 조공하게 되었다.

조공을 바치는 답례로 명에서는 비단, 서적, 문방구, 약재, 도자기 등을 받았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정해야 하는데 이를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조선에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둘 중 하나를 요청하자 조선(朝鮮)’으로 결정하여 보내왔다.

명의 사신이 조선에 오면 왕이 수창 궁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글을 받을 정도로 명이 멸망한 후에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계속되었다.

이 같은 명과 청에 대한 사대(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의 결과가 고인 물이 되면서 역동성을 잃고 줄곧 쇠퇴의 길로만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 많은 고려의 충신들을 화장하고, 고려 태조의 후손인 왕 씨들을 바다 속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일 등을 잘 알고 있었던 명은 조선의 개국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조선에서 조공이란 이름으로 물량 공세를 펴자 누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이란 호칭을 들어 본 일도 없고, 태종 때에 가서야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서신만 해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 생일에 성절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황실 경사 때 보내는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에 보내는 진위사 등이 있었다.


국가의 지배층인 왕과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이처럼 굽실거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반 백성들에게 한 없이 잘난 척하고 수탈을 일삼았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고 난 후대 왕이 작성하게 되는데 사관들의 사초와 관상감 일기, 춘추관 일기, 승정원일기 등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완성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봉안식을 올리고 사고에 보관하게 되는데 편찬 후에도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왕은 볼 수 없도록 했다.

이 실록들은 형식상 매우 공정을 기한 것 같지만 후대 왕의 영향력이 컸고 당시 사관이나 실록 편찬자가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 반대의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록이 쓰인 후 수정실록이라는 이전의 실록 기록을 부정하는 괴상한 책이 여러 번 등장한 일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편찬되고 당대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연산군만 이를 보았다. 처결된 결과에 대한 사관의 생각이나 평가가 기록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승정원일기는 아무나 어느 때나 꺼내 볼 수 있는 공개된 문서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왕의 잘 잘못에 대한 평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 옆에는 왕의 언행이나 신하들의 발언, 그리고 상소 내용을 기록하는 사관과 주서가 있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벼슬을 팔았다. 벼슬을 판돈이 국가 재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민비와 고종의 비자금, 그리고 대부분이 민씨들의 사복을 채우는데 들어갔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치부 중 치부를 살펴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이이기에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인간이 이처럼 추하고 비열해 질 수 있음을 마음속으로 깊이 내성하고 경계해야 할 일임을 보여준다.


Copyrights ⓒ 경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문이주기자 뉴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