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저린 교훈 [국정일보 문이주 기자]

입력시간 : 2020-02-18 15:04:14 , 최종수정 : 2020-02-19 15:39:50, 문이주 기자

                                                                                        국정일보  문이주기자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해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했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해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해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해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 전답, 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해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金孝孫)은 그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이를 수 있었다. - 연산군 81125]

연산군은 장녹수라는 궁녀에게 빠져 놀아났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에 관한 같은 기록이 [연산군일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궁인과 기생은 물론이고 여염집 아녀자들까지 거침없이 희롱했으며, 심지어 친족과 간음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불사했다.

또한 전국에서 운평(가무를 담당하던 기생)을 뽑아 대궐에 들여 '흥청(興淸)'이라고 하고, 밤낮으로 풍악을 울렸다. 여기에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다.

1506(연산군 12) 92, 반란군이 연산군의 행태를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었던 성희안, 박원종 등이 반정을 주도했다.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도망가기에 바빴다. 아무도 연산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국왕도 쫓겨난다. 결국 궁궐에 들이닥친 반정 세력들은 대비인 정현왕후의 재가를 얻어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 사건이 중종반정이다. 이것은 중종반정이 신하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역사에서는 태종이나 세조처럼 형식이야 어찌 되었든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왕위를 찬탈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폐출한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왕을 몰아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권 국가인 조선에서 신하가 왕을 몰아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의 양반관료 체제가 얼마나 견고한 조직인지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꿈꿨던 연산군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양반관료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었을망정 조선의 양반관료 체제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고, 역으로 왕을 갈아치웠다.

연산군이 만약 현명한 군주였다면 훈구파와 사림파 두 세력이 적당히 서로를 견제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력 균형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다가, 경우에 따라서 한쪽 편을 들어주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정국을 이끌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러한 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전권을 휘두르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이 아주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도 잘 짓고 머리도 좋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관련된 궁중의 권력 투쟁에 연루되어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 군주는 패륜아로 몰리게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겨우 31세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은 왕의 묘호(廟號)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의 죽음 이후 그의 식솔들 역시 궁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연산군은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중요한 교훈과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삼사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다는 사실이다.

연산군의 폐출은 백성이 아닌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왕도 쫓겨날 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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